부부간 성관계는 언제든 동의된 것이다? : 숨겨진 범죄, 아내강간
한국여성의전화
아내강간, 범죄로 인정되기까지
1970년, 대법원은 남편이 강제로 아내를 강간했더라도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경우에는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결하였다(70도29 판결). 원심에서는 아내가 남편에 대해 간통죄 고소 및 이혼소송을 제기하였고, 남편이 다른 여자와 동거 중이기에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아니라고 보고 강간을 유죄로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아내가 고소를 취하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부부관계가 이어지고 있어 ‘(남편의) 정교청구권’이 여전히 유지된다고 보아 강간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판결의 근거는 ‘폭행·협박 여부’도 아니었고, ‘동의 여부’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 판결의 유일한 근거는 부부간의 성관계는 당연한 것이며, 그리하여 부부간에 강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통념이었다. 당시 강간죄 등을 명시하고 있는 형법 제32장의 제목은 ‘정조에 관한 죄’였으며, 강간죄의 객체는 ‘부녀’였다. 다시 말해 ‘부녀’에 ‘아내’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995년, 형법 제32장 ‘정조에 관한 죄’는 ‘강간과 추행의 죄’로 개정되었다. 이로써 강간죄의 보호법익이 ‘정조’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2012년, 강간죄의 객체가 ‘부녀’에서 ‘사람’으로 확대되었다. 성폭력 사건에 있어 현재 또는 장래의 배우자를 전제로 한 여성의 ‘정조’ 혹은 ‘성적 순결’을 ‘보호’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제도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로써 ‘(아내를 포함한) 여성’이 독립된 개인으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단서가 생겼다.
그리고 2013년 5월 17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남편이 아내를 흉기로 위협해 강간한 사건에서 아내강간을 최초로 인정하였다(2012도14788, 2012전도252 전원합의체 판결). 재판부는 “부부 사이에 민법상의 동거의무가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폭행, 협박에 의하여 강요된 성관계를 감내할 의무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혼인이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포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없고, 성적으로 억압된 삶을 인내하는 과정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라며 강간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폭행·협박이 피해자를 곤란하게 할 정도인지의 여부는 ‘폭행 또는 협박의 내용과 정도가 아내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한 정도’, ‘남편이 힘을 쓴 경위’, ‘결혼생활의 형태와 부부의 평소 성교 전후의 상황’ 등을 종합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라며 피해자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의 폭행이나 협박이 있어야 강간죄가 성립된다는 최협의설의 입장을 유지하였다. 또한, ‘부부 사이의 성생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가정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최대한 자제하여야 한다’는 전제를 둠으로써 아내강간을 국가가 개입해야 할 사회적 범죄가 아닌, 가정 내의 문제 혹은 개인적인 문제로 위치시켰다.
실태조차 알 수 없는 아내강간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1년 여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여성이 경험한 ‘평생 성적 폭력의 가해자’의 13.5%는 배우자이다. 2010년 가정폭력 실태조사에서 가정폭력 피해여성을 대상으로 한 설문을 살펴보면, 지난 1년간 가정폭력 피해 중 ‘성학대’를 경험한 비율(중복응답)이 70.4%로 나타났다. 그 구체적인 양태로는 원치 않는 성관계를 강요당했던 경험이 70.9%, 원치 않는 형태의 성관계를 강요당한 경험은 57.4%로 보고되었다. 이후의 가정폭력 실태조사에서는 피해여성을 대상으로 한 부가조사를 공개하고 있지 않아 최근의 피해 경향은 알 수 없다. 여성가족부에 보고되는 성폭력 피해 상담소 및 보호시설의 운영실적에도 가족, 친인척, 배우자에 의한 성폭력 사례를 함께 집계하고 있어 아내강간에 대한 실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일부나마 보고되고 있는 아내강간 피해 경험은 범죄로서는 어떻게 처리되고 있을까. 대검찰청 범죄분석을 비롯하여 국가에서 발표하는 범죄 통계에서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 중 남편에 의한 성폭력 범죄를 파악할 수 있는 항목은 없다. 이 때문에 남편에 의한 성폭력 범죄가 얼마나 신고되는지, 어떻게 처벌되는지도 알 수 없다. 피해자들이 아내강간을 신고하는 경험 자체가 매우 적기도 하다. 아내강간은 신고한다고 하더라도 ‘부부간’에 발생했다는 이유로 성폭력으로 인정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2022년 한국여성의전화 상담통계에서 부부관계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 중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한 건수는 단 1건에 불과했다. 경찰에 아내강간을 신고한 역대 상담 사례를 들여다보면, ‘이혼할 때 유리하게 적용되려고 신고한 거 아니냐?’, ‘가족인데 신고하냐, 이혼하면 그만인데 남편을 범죄자로 만들어야 하냐?’ 등의 경찰에 의한 2차 피해가 발견되기도 했다.
폭력적이거나 강압적인 관계의 지속적인 영향을 받는 부부관계에서는 아내강간 역시 다른 성폭력과 마찬가지로 ‘폭행·협박’ 없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원치 않는 때(‘생리중이거나’, ‘아프거나 피로할 때’)에 원치 않는 형태의(‘아이가 보는 앞에서’) 성행위를 강요하는 등 성기 삽입이나 접촉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강압적 행위를 동반하고 있기도 하다. 이에 아내강간 피해자들은 이를 신고하거나, 신고하더라도 ‘물리적’으로 입증하기 어려운 현실에 놓인다.
아내강간을 명문화하고,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강간죄 구성요건 개정하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2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연구에 따르면 성폭력 관련 법 및 제도 인지도 항목 중 ‘부부 사이라도 강제로 성관계를 할 경우, 강간죄에 해당된다’라는 항목에 응답자 70.4%가 ‘안다’라고 답했다. 또한, 2021년 여성폭력 실태조사의 친밀관계 폭력에 대한 인식 조사 항목 중 ‘연인이나 배우자가 싸우고 난 후에 성관계를 요구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라는 항목에 97.9%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제 연인, 배우자 관계라도 동의하지 않는 성관계는 강간이라는 인식은 상식이 되었다.
해외에서는 오래전부터 아내강간죄를 인정해왔다. 미국은 1984년 부부강간을 유죄로 인정했고, 영국은 1991년 최고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배우자 강간 면책조항을 공식 폐기하였다. 프랑스는 2010년 부부간 강간을 가중처벌 사유로 확립하였다. 한편,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2007년부터 한국에서 아내강간죄가 처벌되고 있지 않은 점을 지적해왔다. 특히 2011년, 이러한 권고에 한국 정부는 “한국은 아내 강간을 인정하는 방향의 판결이 나오고 있으니 명문화할 필요 없다”라고 답했으나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는 “법 해석을 잘못할 우려가 있으니 명문화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한 바 있다. 가장 최근 권고안이 발표된 2018년까지 지속적으로 명시되고 있음에도 한국 정부는 이에 응답하지 않고 있다.
어떤 관계에서든 원치 않는 성관계는 강간이다. 이 당연한 상식이 인정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이는 명확히 다시 쓰여야 한다.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하라. 아내에 대한 성폭력은 형사적으로 처벌되어야 함을 명시하라. 그리하여 아직도, 언제나 ‘동의’ 상태에 있다고 여겨지는 아내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다르게 바라볼 첫걸음이 간절히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