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에 ‘성적 수치심’이 아니라 불쾌감을 느껴 무죄?
지난 5월 14일, 13세 여학생에게 5만 원권 지폐를 보여주며 “너는 몸매가 예쁘니까 준다.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따라와라” 등의 발언을 한 60대 남성이 항소심(창원지방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본 사건 1심 재판부는 가해자의 발언이 성적 수치심을 주는 성적 학대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성적 수치심은 들지 않았고 조금 무서웠다.”, “불쾌감을 느꼈다”라는 피해자의 진술을 근거로 무죄를 선고했다. 더불어 재판부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신체를 성적 대상으로 묘사하거나 성적 행위를 연상할 표현을 사용했다고 보이지 않고 신체 접촉도 없었다.’라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창원지방법원의 무죄 판결은 성적 수치심에 관해 변화되어 온 시민의 인식과 사회적 논의를 역행하는 것이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 이후 ‘성적 수치심’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71.6%의 응답자가 ‘느끼지 않았다’고 답했으며, ‘성폭력 피해 경험 이후 든 감정’으로 ‘불쾌감’이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화’, ‘역겨움’, ‘짜증’이 뒤를 이었다. 이처럼 성폭력 피해자는 범죄 피해자로서 ‘수치심’만을 느끼는 것이 아닌 여러 맥락에서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에 한국여성의전화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은 오래전부터 성폭력특별법 등에서의 범죄 구성요건을 피해자가 느끼는 ‘성적 수치심’이 아닌 가해행위를 중심으로 개정할 것을 요구해왔다. 이러한 운동의 결과로, 판결 및 제도 등에 조금씩이나마 변화가 만들어져 왔다. 2020년 대법원은 “‘성적 수치심’의 의미를 협소하게 이해하여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이 표출된 경우만을 보호의 대상으로 한정하는 것은 피해자가 느끼는 다양한 피해 감정을 소외시키고 피해자로 하여금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을 느낄 것을 강요하는 결과가 될 수 있으므로, 피해 감정의 다양한 층위와 구체적인 범행 상황에 놓인 피해자의 처지와 관점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라며 불법촬영에 관해 유죄 판결한 바 있다. 그리고 2021년 검찰은 ‘수치심’이라는 표현이 피해자다움을 강요한다고 판단하여 ‘대검찰청 공무직 등 근로자 지침’에서 ‘성적 수치심’을 ‘성적 불쾌감’으로 개정·시행하였고, 2022년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피해자가 실제로 느끼는 피해 감정을 고려해 양형 기준의 양형인자에서 ‘성적 수치심’을 ‘성적 불쾌감’으로 변경하였다. 이어서 2022년 국회는 성폭력 범죄 판단 기준을 ‘성적 수치심’을 ‘불쾌감’으로 개정하는 법안 등을 발의하는 등 변화의 움직임들이 각개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2023년 3월 국회 법제 사법소위원회 심의에서 법무부 등은 “의미가 불명확하고 처벌 범위가 지나치게 확장될 수 있다”, “‘성적 수치심’ 해석에 있어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거나 부끄러움을 실제로 느낄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라고 주장하며 논의를 보류시켰다.
여전히 ‘성적 수치심’이 수사·재판과정에서 성폭력 범죄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사법부는 성폭력에 대한 통념에 기반한 협소한 기준이 아닌, 제대로 된 인식을 바탕으로 엄중히 판결하라. 법무부는 ‘처벌 범위’ 운운하며 법 개정을 막을 것이 아니라, 안전한 사회 구현 및 피해자 권리를 보장하는 소임을 다하라. 국회는 사회적 요구에 맞춰 하루빨리 성폭력특별법을 개정하라. 국회와 정부, 사법부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요구되는 ‘피해자다움’을 해체하고 성폭력 피해자의 인권을 보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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