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공군 중사에 의한 성폭력 사건 피해자인 故이예람 중사가 순직을 인정받았다. 선임 부사관인 중사로부터 입은 성폭력 피해를 고발한 이후 가해자, 공군 법무실장, 준위 등에 의한 극심한 2차 피해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1년 8개월여 만이다. 지난 10일에는 부하였던 성소수자 여군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해군 상관이 징역 8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두 명의 남성 해군 상관에 의해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는 법정 투쟁을 시작한 이후 이 당연한 판결을 받기 위해 5년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故이예람 중사의 순직 인정과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 한 명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본 사건들도, 군대 내 성폭력 문제도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故이예람 중사가 입은 2차 피해 관련 재판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에서 대법원은 두 명 중 한 명의 가해자에게는 무죄를 선고하는 반쪽짜리 판결을 내렸다. 이 반쪽짜리나마 판결을 받기까지, 피해자가 부딪혔던 벽은 피해 당시 ‘반항’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형법 제297조에서 강간죄가 성립되는 구성요건으로 ‘폭행’ 또는 ‘협박’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규정된 결과이다.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여성들과 시민 사회는 오랫동안 강간죄 개정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왔다. 1월 27일, 여성가족부는 “강간죄 구성요건을 현행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하는 ‘비동의 강간죄’ 개정안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법무부는 개정 계획이 없다며 반대 의견을 밝혔고, 여성가족부는 9시간 만에 이를 철회했다. 한동훈 법무부장관은 “‘비동의 강간죄’가 도입되면 억울한 사람이 처벌받을 가능성이 커진다”며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진정 법무부가 보호해야 할, 억울하고 권리를 침해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성폭력은 정말 ‘폭행’ 또는 ‘협박’이 있어야만 발생하는가. 2월 8일 자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여성가족부가 실시한 ‘2022 성폭력 안전실태조사’에서 성추행 피해를 겪은 상황에서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다고 답한 여성 비율은 각각 2.7%, 7.1%로 10% 미만으로 나타났다. 또한,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에서 2019년 1월부터 3월까지의 상담사례를 분석한 결과, 성폭력 피해사례 총 1,030명 중 직접적인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성폭력 피해사례는 71.4%에 달했다. 더 큰 위험이 예상돼 강하게 저항할 수 없거나, 가해자와의 권력관계로 인해 저항 의사마저 표할 수 없는 경우 등 폭행과 협박이 아니어도 강제력이 행사되는 여러 유형의 피해가 존재한다. 이처럼 현행법은 피해자가 놓인 상황이나 관계, 맥락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성폭력 피해를 포괄하지 못해 피해자들을 법의 사각지대에 몰아넣고 있다.
오래전부터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 UN 고문방지위원회(CAT) 등 국제 인권기구들은 한국에 수차례 비동의 강간죄를 명문화할 것을 권고해왔다. 올해 1월에는 UN 인권이사회 회원국들이 한국의 군대 내 성폭력 문제 해결을 권고하기도 하였다. 국제 사회도 한국의 처참한 실태에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국제사회가, 시민들이, 여성들의 경험이 말하는 현실을 무시하는 국가는 철저히 반성하라. 법질서를 확립하고 국민의 인권을 보장해야 할 법무부는 본연의 임무부터 자각하라. 성평등 전담 부처인 여성가족부는 타 부서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 소임을 수행하라. 그리하여 국가는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비롯, 성폭력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를 다하라.
*관련 기사 : https://www.hani.co.kr/arti/society/women/1078745.html#ace04ou
*당신과 함께하는 기억의 화요일 ‘화요논평’ 2023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