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장 논평]
후기 임신중지 여성 ‘살인죄’ 무죄, 당연한 판결
이제 정부가 권리 보장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
지난 7월 23일,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는 후기 임신중지를 이유로 1심 재판에서 ‘살인죄’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던 권00 씨에 대해 원심의 판결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 권00 씨가 사건 당시 병원에서 태아의 사산 조치 여부를 적극적으로 의료인에게 질문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판단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사건 당시의 피고인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짚으며 살인을 적극적으로 공모할 만한 ‘미필적 고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우리는 사건 당시 임신중지 당사자의 상황과 현재의 보건의료, 법·제도적 공백을 구체적인 판단의 근거로 삼아 명확하고 정당한 판단을 내린 항소심 재판부의 무죄 판결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항소심 재판부는 ‘낙태죄’ 폐지 이후의 법적 판단 기준을 명확하게 세웠다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전에도 형법상 살인죄는 ‘낙태죄’와 구분하여 태아가 모체 밖으로 살아서 태어난 이후 적극적인 살해 행위가 이루어진 사건에 대하여 적용되었다. 따라서 ‘낙태죄’가 폐지된 지금 살인죄로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을 대신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원심 재판부는 임신중지를 하고자 했던 권00 씨에 대해 계속해서 살인의 의도를 추정하고 임신중지에 대한 책임을 살인죄 처벌로서 묻고자 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러한 원심의 판단이 임신중지를 하고자 했던 산모의 의도에 대하여 사실을 오인하거나, 살인죄에 관한 공모관계 및 미필적 고의에 관한 법률을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짚었다. 또한 임신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이 ‘헌법상 보장되는 일반적 인격권에서 파생되는 권리’이기에, 의료인들의 행위 또한 이러한 당사자의 권리에 기반한 임신 종결 의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참작하여 양형을 조정하였다.
이러한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임신중지에 관한 권리는 그 자체로서 보장되어야 하며, 다른 형사 처벌 조항이 무리하게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법리로서 명확하게 확인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이번 판결은 비단 이 사건의 당사자 권00 씨만이 아닌, 같은 현실에 처해 있는 수많은 이들에게 미칠 영향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후기 임신중지의 상황에 이르게 되는 이들은 대부분 권00 씨와 같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의료기관에 대한 접근성에 제약이 있고, 여전히 비공식적인 관행에 맡겨진 보건의료 현실 속에서 임신중지 시기가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심의 판단대로라면 이러한 현실로 인해 가장 열악한 선택지로 내몰리고 있는 이들이 오히려 ‘살인죄’로 처벌을 받게 될 수 있었다.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은 이와 같은 현실을 분명히 인식한 판단이며, 임신중지 비범죄화 이후에도 아무런 변화를 만들지 않은 채 여전히 임신 당사자만을 처벌하고자 한 정부의 책임을 확인한 것이다.
보건의료 체계 구축의 책임은 뒷전에 둔 채 당사자 수사 의뢰에 나섰던 보건복지부의 ‘고의’가 유죄다
한편 우리는 주무부처로서의 책임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방기한 채, 도리어 임신중지의 당사자에 대한 수사를 먼저 나서서 경찰에 의뢰했던 보건복지부의 ‘고의’를 강력히 규탄한다. 보건복지부는 7년 전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임신중지 비범죄화가 이루어진 즉시,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어 온 보건의료 체계부터 새롭게 구축해야 했다. ‘낙태죄’가 존속해 온 66년 동안, 국가는 인구정책과 처벌 책임의 모순 사이에서 임신중지 관련 보건의료 현장을 철저하게 방치해왔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80년대부터 사용해 온 유산유도제는 소개되지도 않았고, 안전한 시술 방법에 대한 가이드도 부재한 상태에서 의료인들은 임신중지를 결정한 이들에게 더 안전한 최신의 의료 행위를 적용할 수 없었음은 물론,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한 비공식적 관행만을 강화해 왔다. 사정이 절박한 임산부의 상황을 이용해 브로커로 환자를 모으고, 높은 비용을 현금으로 요구하며, 이후 행해질 의료 행위와 사후 조치, 후속 진료에 대한 설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번 사건의 과정 안에 ‘낙태죄’ 처벌 의료현장에 미쳐 온 역사적 영향의 결과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진해여성의전화#진해성폭력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