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것’만은 원인으로 꼽지 않는 사회
-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10주기를 앞두고 광주 10대 여성 살해 사건을 마주하며
10년 전, 강남역 10번 출구를 덮었던 수많은 포스트잇과 국화꽃, 그리고 “여자라서 죽었다”는 절규는 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넘어, 여성들이 더 이상 ‘우연히 살아남는 사회’가 아니어야 한다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또다시 같은 슬픔과 분노 앞에 서 있다.
지난 어린이날, 광주에서 한 10대 여성이 일면식 없는 20대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가해자는 '사는 게 재미없어 자살을 고민하다 범행 충동이 들었다'고 주장했지만, 이 사건은 결코 우발적 사건이 아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일면식 없는 남성에 의한 여성살해 사건을 분석한 ‘분노의 게이지 보고서’에 따르면 가해자들은 “나와 성관계를 해주지 않아서”,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등의 핑계를 대며 일면식 없는 여성을 살해했다. 여성을 남성의 성관계 혹은 분풀이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의무가 있는 존재로 여기는 성차별적 관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동기’다. 성차별적 관념과 사회 구조가 범죄의 대상을 여성으로 선택하게 했다는 점이 이 문제의 본질이다. 이 사건의 가해자가 스토킹하던 다른 피해자가 피신하자 미리 흉기를 준비해 또 다른 여성을 특정하여 공격했다는 점은 이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경찰은 가해자에 대한 사이코패스 진단 검사를 시행했으나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당시와 유사한 대응이다. 가해자 개인의 심리적·병리적 문제로 사건을 설명하려는 방식은 그래서 지난 10년을 바꾸었는가. 신당역, 신림동, 대전, 의정부, 대구, 부평, 동탄, 남양주, 울산…… . 본질을 외면한 진단은 아무것도 막지 못했다.
11일, 대통령 비서실장은 경찰청에 철저한 수사와 순찰 강화, 통학로 안전 점검, 방범시설 보강 등 종합적인 안전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인 오늘, 안산에서 스토킹처벌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가 구속영장 기각으로 풀려난 50대 남성이 흉기를 들고 피해자를 찾아가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비서실장이 언급한 ‘종합적인 안전대책’은 안산 사건을 막을 수 있는가.
비서실장이 ‘종합적인 안전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날, 성평등가족부는 제16차 여성폭력방지위원회 사전브리핑에서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을 계기로 마련했던 여성 대상 강력 범죄 및 동기 없는 범죄 종합 대책의 사각지대가 없는지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대책은 CCTV 확충, 남·여 화장실 분리설치, 범죄취약요인 집중 신고기간 운영, 정신질환 및 알코올 중독에 대한 치료지원 강화, 강력범죄에 대한 엄중한 처벌 등의 내용이었다. 성평등가족부는 이 정도의 대책을 점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는가. 당시 대책의 말미에는 ‘피해자에 대한 다각적인 지원과 양성평등문화 조성’도 포함되었었다. 이는 어떻게 추진되어 어떤 성과를 냈는가, 혹은 내지 못했는가. 어떤 관점에서 점검할 것인가.
2016년 5월 17일 이후에도 수많은 여성살해 사건들이 발생했다. 당장 올해만 해도 신고하고도 살해당한 사건들, 신고도 못하고 살해된 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그 끝에 광주 사건이 있다. 반복되는 여성 살해, 반복되는 실패에 ‘엄중한’ 대책을 주문하는 목소리만이 반복된다. 그 동일한 풍경이 참담하다.
여성들이 우연히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사회, 여성들이 우연히 살해당하는 사회, 이 모든 문제의 본질이 성차별이라는 많은 시민들의 지적에도 ‘그것’만은 원인으로 꼽지 않는 사회, 그리하여 다시금 피해자의 생명을 지키는 데 실패하는 사회, 이런 사회가 문제의 본질이다. 대책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슬픔과 분노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당신과 함께하는 기억의 화요일 ‘화요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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